하워드 켄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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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워드 켄달은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1961년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선수 시절 FA컵 준우승, 풋볼 리그 1부 리그 우승 등을 기록했으며, 스토크 시티 FC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감독으로서 에버턴 FC에서 1983-84 FA컵 우승, 1984-85 풋볼 리그 1부 리그와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을 달성하며 명성을 얻었다. 또한 노츠 카운티 FC를 이끌고 1994-95 앵글로-이탈리안 컵에서 우승했으며, 1984-85, 1986-87 시즌 잉글랜드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2005년에는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1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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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켄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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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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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Howard Kendall |
출생일 | 1946년 5월 22일 |
사망일 | 2015년 10월 17일 |
사망 장소 | 사우스포트, 잉글랜드 |
신장 | 170cm |
포지션 | 미드필더 |
선수 경력 | |
유소년 클럽 |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1961–1963) |
클럽 |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1963–1967): 104경기, 13골 에버턴 FC (1967–1974): 229경기, 21골 버밍엄 시티 FC (1974–1977): 115경기, 16골 스토크 시티 FC (1977–1979): 82경기, 9골 블랙번 로버스 FC (1979–1981): 79경기, 6골 에버턴 FC (1981): 4경기, 0골 |
총 출장 및 득점 | 613경기, 65골 |
감독 경력 | |
클럽 | 블랙번 로버스 FC (1979–1981) 에버턴 FC (1981–1987) 아틀레틱 빌바오 (1987–1989) 맨체스터 시티 FC (1989–1990) 에버턴 FC (1990–1993) 크산티 (1994) 노츠 카운티 FC (1995) 셰필드 유나이티드 FC (1995–1997) 에버턴 FC (1997–1998) 에트니코스 피레우스 (1998–1999) |
2. 선수 경력
켄달은 타인 위어주 리턴에서 태어나 1961년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에 견습생으로 입단했다. 1963년 5월 프로 선수로 전향하여 1964년 FA컵 결승전에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를 상대로 경기를 뛰었다. 당시 17세 345일이었던 그는 웸블리 결승전에 출전한 최연소 선수였으며,[3] 1879년 FA컵 결승전에서 클래펌 로버스 FC 소속으로 17세 245일의 나이로 경기를 했던 제임스 F. M. 프린셉 이후 최연소 결승 진출 선수였다. 프레스턴은 결승전에서 마지막 순간에 패했다.
원래 수비수였던 켄달은 1967년 3월 8.5만파운드에 에버턴 FC로 이적했다.[3][4] 앨런 볼, 콜린 하비와 함께 미드필더로 이동했으며, 이들은 "성 삼위일체"라는 별명을 얻었다.[5] 1968년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패배했고, 1969-70 시즌에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세 시즌 동안 켄달은 주장으로서 에버턴을 이끌었지만, 1972-73 시즌에 17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리그 우승을 기반으로 팀을 구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5]
1974년 2월, 켄달은 버밍엄 시티 FC로 이적하여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4시즌 동안 버밍엄의 1부 리그 잔류와 1975년 FA컵 준결승 진출에 기여했다.[6][4] 1977년 8월에는 4만파운드의 이적료로 스토크 시티 FC에 합류했다.[7] 조지 이스텀 감독 아래 스토크는 상위 리그 복귀를 목표로 했으나,[7] 1977-78 시즌 초반 부진으로 이스텀은 해고되고 1978년 2월 앨런 더번으로 교체되었다. 더번은 켄달을 선수 겸 코치로 임명했고, 켄달은 이 역할에서 성공하여 구단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7] 더번은 1978-79 시즌 동안 켄달을 중심으로 팀을 구축하여 스토크는 3위를 기록하며 1부 리그로 승격했다.[7]
1979년 6월, 켄달은 선수 겸 감독으로 3부 리그 블랙번 로버스 FC에 합류했다.[7] 1979-80 시즌에 팀을 2부 리그로 승격시켰으며, 1981년에는 골득실차로 1부 리그 승격을 아깝게 놓쳤다.[9] 1981년 5월, 선수 겸 감독으로 에버턴에 복귀하여 1981년 12월 선수 은퇴 전까지 4경기만 출전했다.[5][6]
켄달은 여러 차례 국가대표팀에 포함되었지만, 시니어 레벨에서는 잉글랜드에서 뛰지 못했다. 스쿨보이, 유스, 23세 이하 대표팀에서 활약했고, 1964년 리틀 월드컵 결승전에서 잉글랜드 유스팀 주장을 맡아 승리했다.[6]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 FA컵 준우승 (1963–64)
'''에버턴 FC'''
- 풋볼 리그 1부 우승 (1969–70)
-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1970–71)
- FA컵 준우승 (1967–68)
2. 1.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1961년 세컨드 디비전(2부)의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에 입단하여 1963년 5월 프로 계약을 맺었다. 1963-64 시즌 프레스턴 노스 엔드는 세컨드 디비전 소속 클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FA컵 결승에 진출했다. 켄달은 결승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전에 출전했지만, 아직 18세가 되지 않아 대회 결승전 역대 최연소 출전 기록을 세웠다[44]。 왼쪽 사이드 하프 레귤러는 이안 데이비드슨이었지만, 클럽 허가 없이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탓에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2. 2. 에버턴 FC
1967년 3월, 이적료 85000GBP에 1부 리그의 에버턴 FC로 이적했다.[3][4] 그 전까지는 주로 수비수로 뛰었지만, 에버턴에서 미드필더로 전향, 앨런 볼, 콜린 하비와의 트리오는 "성 삼위일체"(The Holy Trinity)로 불렸다.[5][45] 1969-70 시즌에는 주전 선수로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70년 FA 채리티 실드에서도 우승했다. 이어진 3시즌은 에버턴의 주장을 맡았지만, 우승 경쟁과는 거리가 멀었고, 1972-73 시즌에는 17위에 머물렀다.[5][45]1981년 5월, 선수 겸 감독으로 에버턴에 복귀하여 클럽을 이전의 영광으로 되돌리려 했지만, 1981년 12월 선수 은퇴 전까지 4경기만 출전했다.[5][6] 구디슨 파크로 감독으로 복귀한 그는 7명의 선수를 영입했는데, 그중에는 버리에서 골키퍼 네빌 사우스올을 영입했다. 사우스올은 클럽에서 17년을 보내며 5번의 주요 트로피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후 두 시즌 동안 그는 윙어 트레버 스티븐과 미드필더 피터 레이드를 포함한 선수를 추가로 영입했다. 에버턴은 켄달이 감독으로 부임한 첫 시즌에 8위로 마쳤고, 1년 후 7위로 올라섰지만, 1983-84 시즌에는 초반에 부진하여 첫 21번의 리그 경기에서 6번만 승리하고 강등권에 놓였다.[10]
켄달은 해고 직전이었다고 알려졌지만,[1] 시즌 후반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11월에 울브스의 스트라이커 앤디 그레이를 25만파운드에 영입한 것이 도움이 되어 에버턴의 경기력이 향상되었다. 그들은 리그 컵 결승에 진출했지만(재경기에서 리버풀에게 패배) FA컵에서 우승했다(왓퍼드를 2-0으로 격파).[11]
1984-85 시즌에 에버턴은 리그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여 준우승팀인 리버풀보다 13점 앞섰고, 유럽 컵 위너스 컵에서 오스트리아의 라피트 빈을 꺾고, FA컵 결승에도 다시 진출했다.[12][13] 에버턴은 1985-86 시즌에 리그와 FA컵에서 모두 우승하는 데 실패했는데, 두 대회 모두 리버풀에게 준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1986-87 시즌에는 리그에서 다시 우승하여 지역 라이벌보다 9점 앞섰고, 머지사이드 클럽들은 잉글랜드 축구계를 계속해서 장악했다.[12][13][14]
구디슨 파크에서의 첫 번째 재임 기간 동안 그는 10년 전체에서 가장 훌륭한 팀 중 하나임을 증명한 거의 새로운 팀을 만들었다. 그는 피터 레이드와 트레버 스티븐과 같은 젊은 선수들을 더 작은 클럽에서 영입하여 그들에게 최고 수준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를 주었고, 대체로 성공적이었다.[15] 그는 또한 1983년 말에 팀에 합류한 후 1년 반 동안 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앤디 그레이와 같은 기성 스타 선수들을 영입했는데, 그의 골은 고전하던 팀을 FA컵 우승팀, 그리고 리그 챔피언 및 유럽 컵 위너스 컵 우승팀으로 변모시켰다.[16] 그 후 그는 그레이를 애스턴 빌라로 판매하고 게리 리네커를 영입했는데, 그는 1985-86 시즌에 38골을 기록했지만, 주요 트로피에서 우승하는 데 실패했다. 에버턴은 2월 초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리그 선두에서 끌어내렸지만 시즌 마지막 단계에서 리버풀에게 추월당하여 시즌 마지막 주말에 지역 라이벌에게 타이틀을 넘겨주었다. 그들은 이후 머지사이드에서 열린 FA컵 결승전에서 3-1로 패했다.[17]
켄달은 잉글랜드 클럽의 유럽 대회 출전 금지에 좌절하여[18] 1987년 여름에 에버턴을 떠나 스페인에서 아틀레틱 빌바오를 감독했다.[1] 에버턴과 함께 더 많은 유럽에서의 성공을 놓친 기회뿐만 아니라, 유럽 대회에서 잉글랜드 클럽의 출전 금지는 이 기간 동안 게리 리네커를 포함한 잉글랜드의 주요 선수들이 해외로 이적하게 된 주요 요인이었다. 리네커는 구디슨 파크에서 단 한 시즌을 보낸 후 바르셀로나와 계약했다. 잉글랜드 클럽의 출전 금지로 인해 에버턴은 두 번이나 유러피언컵에 참가하지 못했다.
1990-91 시즌 전반전에는 퍼스트 디비전 상위권에 안착하며 강한 맨체스터 시티를 만들었지만, 1990년 11월 7일, 콜린 하비 감독의 해임에 따라 다시 에버턴의 감독으로 취임했다.[55] "맨체스터 시티에서의 활동은 단순한 일이었지만, 에버턴과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라고 말하며 이적을 정당화했다.[45] 취임 당시 에버턴은 퍼스트 디비전 잔류 경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곧 흐름을 바꿔 9위로 시즌을 마쳤고, FA컵에서는 5라운드에서 리버풀을 꺾고 8강에 진출했다. 1991년 여름에는 모 존스턴과 피터 비어슬리 등을 영입했지만, 에버턴은 중위권에 머물렀고, 1993년 12월 4일에 사임했다.
1997년 8월, 에버턴의 감독으로 세 번째 취임을 했지만, 1997-98 시즌 중에는 클럽 내부의 소동에 휘말렸다. 또한, 최종전에서 간신히 잔류가 결정되는 부진을 보였고, 시즌 종료 후 클럽과 감독 쌍방 합의 하에 계약을 해지했다.
2. 3. 버밍엄 시티 FC
1974년 2월, 퍼스트 디비전의 버밍엄 시티 FC로 이적했다.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4시즌 동안 버밍엄의 퍼스트 디비전 잔류와 1975년 FA컵 준결승 진출에 기여했다.[6][4]2. 4. 스토크 시티 FC
켄달은 1977년 8월, 4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스토크 시티 FC에 합류했다.[7] 조지 이스트햄 감독 아래 스토크는 상위 리그로 복귀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7] 하지만 1977-78 시즌 초반의 부진한 결과로 인해 이스트햄은 해고되었고, 1978년 2월 앨런 더번으로 교체되었다. 더번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켄달을 선수 겸 코치로 임명하는 것이었고, 그는 이 역할에서 성공했으며 그의 활약은 구단 올해의 선수상을 받게 했다.[7] 더번은 1978-79 시즌 동안 켄달을 중심으로 팀을 구축하여 스토크는 3위를 기록하며 1부 리그로 승격했다.[7] 하지만 더번은 켄달이 1부 리그에서 뛰기를 원했지만, 켄달은 선수 겸 감독으로 3부 리그 블랙번 로버스 FC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7]시즌 | 국내 리그 | FA컵 | 리그컵 | 기타[59] | 통산 | ||||||
---|---|---|---|---|---|---|---|---|---|---|---|
디비전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
1977–78 | 세컨드 디비전 | 42 | 7 | 2 | 0 | 1 | 0 | 0 | 0 | 45 | 7 |
1978–79 | 40 | 2 | 1 | 0 | 5 | 1 | 0 | 0 | 46 | 3 | |
통산 | 82 | 9 | 3 | 0 | 6 | 1 | 0 | 0 | 91 | 10 |
2. 5. 블랙번 로버스 FC
켄달은 풋볼 리그의 서드 디비전(3부) 블랙번에서 선수 겸임 감독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46] 1979년 6월에 블랙번으로 이적하여, 1979-80 시즌 종료 후에는 세컨드 디비전(2부) 승격을 달성했다. 1980-81 시즌에도 승격 경쟁에 참여했지만, 득실차로 퍼스트 디비전(1부) 승격을 놓쳤다. 1981년 5월, 선수 겸임 감독으로 친정팀 에버턴으로 복귀했다. 선수로 출전한 것은 리그 경기 4경기에 그쳤으며, 1981년 9월에 선수로서의 경력을 마감했다.[45]클럽 | 취임 | 퇴임 | 기록 | ||||
---|---|---|---|---|---|---|---|
경기 | 승리 | 무승부 | 패배 | 승률 | |||
블랙번 | 1979년 6월 1일 | 1981년 5월 31일 | 105 | 48 | 33 | 24 | 45.7 |
하워드 켄달은 여러 클럽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며 다양한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다.
3. 감독 경력
팀 시작 종료 기록 경기 승리 무승부 패배 승률 블랙번 로버스 1979년 6월 1일 1981년 6월 1일 105 48 33 24 45.7 에버턴 1981년 6월 1일 1987년 6월 18일 338 183 78 77 54.1 아틀레틱 빌바오 1987년 6월 18일 1989년 11월 11일 102 44 29 29 43.1 맨체스터 시티 1989년 12월 6일 1990년 11월 5일 39 13 18 8 33.3 에버턴 1990년 11월 5일 1993년 12월 4일 162 63 40 59 38.9 스포르팅 크산티 1994년 7월 1일 1994년 10월 30일 10 5 3 2 50.0 노츠 카운티 1995년 1월 12일 1995년 4월 1일 15 4 4 7 26.7 셰필드 유나이티드 1995년 12월 12일 1997년 6월 27일 82 34 27 21 41.5 에버턴 1997년 6월 27일 1998년 6월 25일 42 11 13 18 26.2 에트니코스 피레우스 1998년 12월 3일 1999년 3월 18일 13 0 5 8 0.0 합계[37] 908 405 250 253 44.6 3. 1. 에버턴 FC (1기)
켄달은 1981년 5월 선수 겸 감독으로 에버턴에 복귀하여 1981년 12월 선수 은퇴 전까지 4경기만 뛰었다.[5][6] 감독 부임 첫 시즌에 8위, 다음 시즌에는 7위를 기록했지만, 1983-84 시즌 초반에는 부진하여 첫 21경기에서 6승만을 거두며 강등권에 머물렀다.[10]
1984년 1월, 해임 직전까지 갔지만[43], 울브스에서 앤디 그레이를 영입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리그 컵 결승에 진출했지만 리버풀에 패했고, FA컵 결승에서는 왓퍼드를 2-0으로 꺾고 우승했다.[11]
1984-85 시즌에는 리그에서 리버풀을 승점 13점 차로 제치고 우승했으며, 유럽 컵 위너스 컵 결승에서 라피트 빈을 꺾고 우승했다. FA컵 결승에도 진출했지만, 1985-86 시즌에는 리그와 FA컵 모두 리버풀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다. 1986-87 시즌에는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지역 라이벌 리버풀을 승점 9점 차로 따돌렸다.[12][13][14]
켄달은 에버턴 첫 감독 시절, 피터 리드, 트레버 스티븐 등 젊은 선수들을 영입하고 앤디 그레이와 같은 스타 선수들을 기용하여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15] 특히 앤디 그레이는 팀에 합류한 후 1년 반 동안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FA컵, 리그, 유럽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이끌었다.[16]
헤이젤 참사로 인해 잉글랜드 클럽의 유럽 대회 출전이 금지되면서,[18] 켄달은 1987년 여름 에버턴을 떠나 스페인의 아틀레틱 빌바오 감독으로 부임했다.[1]
; 수상 경력
대회 | 우승 | 준우승 |
---|---|---|
FA컵 | 1983–84 [11] | 1984–85[12], 1985-86 |
FA 커뮤니티 실드 | 1984–85, 1985–86, 1986–87[12] | |
풋볼 리그 1부 | 1984–85, 1986–87[12] | 1985–86[12] |
UEFA 컵 위너스 컵 | 1984–85[12] | |
풋볼 리그 컵 | 1983–84[11] | |
풀 멤버스 컵 | 1990–91 |
3. 2. 아틀레틱 빌바오
켄달의 빌바오 시절은 영입 가능한 선수에 대한 제한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바스크 클럽 지지자들과의 인기는 그들의 전통을 바꾸려 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높아졌다.[19] 그는 첫 시즌에 아틀레틱을 라 리가 4위로 이끌어 다음 시즌 UEFA 컵 진출을 이끌었고,[20] 결국 유벤투스에게 탈락했다. 1988년 11월 뉴캐슬 유나이티드 감독 제안을 거절했지만, 부진한 성적으로 1989년 11월 15일 해고되었고,[1] 그의 다음 직업에 대한 추측이 즉시 시작되었다. 바비 롭슨이 떠나면 다음 잉글랜드 감독이 될 것이라는 보도가 잦았다.[21]3. 3. 맨체스터 시티 FC
Howard Kendall영어은 1989년 12월 7일 맨체스터 시티 감독으로 잉글랜드로 돌아와[22] 14위로 시즌을 마무리하며 팀을 잔류시켰다.[23] 1990 FIFA 월드컵 이후 바비 롭슨이 잉글랜드 감독직에서 물러난다는 발표와 함께, 켄덜의 이름은 언론에서 후임자로 언급되었다.[25] 그러나 그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면접 제안을 거절했으며,[26] 결국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자리는 그레이엄 테일러에게 돌아갔다.[26]켄덜의 맨체스터 시티 감독 시절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시작 | 종료 | 경기 | 승리 | 무승부 | 패배 | 승률 |
---|---|---|---|---|---|---|
1989년 12월 6일 | 1990년 11월 5일 | 39 | 13 | 18 | 8 | 33.3 |
3. 4. 에버턴 FC (2기)
켄달은 1990년 11월 7일, 콜린 하비 감독의 해임에 따라 다시 에버턴의 감독으로 취임했다.[55] 그는 "맨체스터 시티에서의 활동은 단순한 일이었지만, 에버턴과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라고 말하며 이적을 정당화했다.[45] 취임 당시 에버턴은 퍼스트 디비전 잔류 경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곧 흐름을 바꿔 9위로 시즌을 마쳤고, FA컵에서는 5라운드에서 리버풀을 꺾고 8강에 진출했다. 1991년 여름에는 모 존스턴과 피터 비어슬리 등을 영입했지만, 에버턴은 중위권에 머물렀고, 1993년 12월 4일에 사임했다.3. 5. 이후 경력
켄달의 빌바오 시절은 영입 가능한 선수에 대한 제한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바스크 클럽 지지자들은 그가 클럽의 전통을 바꾸려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를 좋아했다.[19] 그는 첫 시즌에 아틀레틱을 라 리가 4위로 이끌어 다음 시즌 UEFA 컵 진출권을 얻었지만,[20] 결국 유벤투스에 패해 탈락했다. 1988년 11월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감독 제안을 받았지만 스페인에 남기 위해 거절했다. 그러나 성적 부진으로 1989년 11월 15일에 해고되었고,[1] 이후 그의 행보에 대한 추측이 쏟아졌다. 바비 롭슨 감독이 떠난 후 잉글랜드 감독이 될 것이라는 보도가 많았다.[21] 1989년 12월 7일,[22] 그는 맨체스터 시티 감독으로 잉글랜드로 돌아와 팀을 14위로 이끌며 강등을 면했다.[23] 한편, 켄달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을 대신하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퍼거슨 감독은 실망스러운 경기력으로 언론의 비판과 팬들의 해임 요구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퍼거슨은 자리를 지켰고, 23년 후 은퇴할 때까지 유나이티드를 이끌며 수많은 우승을 차지했다.[24]1990 FIFA 월드컵 이후 바비 롭슨이 잉글랜드 감독직에서 물러난다는 발표가 5월 말에 나오자, 켄달의 이름이 후임자로 언론에 언급되었다.[25] 그러나 그는 이러한 추측을 즉시 부인하고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면접 제안도 거절했으며,[26] 결국 그레이엄 테일러가 잉글랜드 감독이 되었다. 1993년 11월 테일러가 사임한 후 켄달은 다시 잉글랜드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테리 베너블스가 임명되었다.[27]
4. 수상 내역
하워드 켄덜은 선수 시절과 감독 시절 모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선수로는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에서 FA컵 준우승[3]을, 에버턴 FC에서 풋볼 리그 1부 우승[5], FA 채리티 실드 우승[38], FA컵 준우승[39]을 경험했다. 스토크 시티 FC 소속으로 풋볼 리그 2부 3위를 기록하며 승격[7]에 기여했고, 1977-78 시즌 스토크 시티 올해의 선수[7]로 선정되기도 했다.
감독으로서는 블랙번 로버스 FC를 풋볼 리그 3부 준우승[9]으로 이끌었다. 에버턴 FC에서는 풋볼 리그 1부[12]와 1986-87 시즌[12] 두 차례 우승, FA컵 우승[11], 세 차례의 FA 채리티 실드 우승 (1984, 1985, 1986 (공동 우승))[40], 그리고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우승[12][13]이라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노츠 카운티 FC를 안글로-이탈리안 컵 우승[41]으로 이끌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올해의 잉글랜드 감독[13], 올해의 잉글랜드 감독[14],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감독(1998년 1월)[42]을 수상했다.
4. 1. 선수
팀 | 기록 |
---|---|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 FA컵 준우승: 1963-64[3] |
에버턴 FC | 풋볼 리그 1부 우승: 1969-70[5] |
에버턴 FC | FA 채리티 실드 우승: 1970[38] |
에버턴 FC | FA컵 준우승: 1967-68[39] |
스토크 시티 FC | 풋볼 리그 2부 3위 승격: 1978-79[7] |
개인 | 기록 |
스토크 시티 FC | 스토크 시티 FC 올해의 선수: 1977-78[7] |
4. 2. 감독
팀 | 대회 | 우승 | 준우승 |
---|---|---|---|
에버턴 FC | FA컵 | 1983–84[11] | 1984–85, 1985–86 |
에버턴 FC | 풋볼 리그 1부 | 1984–85,[12] 1986–87[12] | 1985–86 |
에버턴 FC | FA 커뮤니티 실드 | 1984, 1985, 1986 (공동 우승)[40] | |
에버턴 FC | UEFA 컵 위너스 컵 | 1984–85[12][13] | |
에버턴 FC | 풋볼 리그 컵 | 1983–84 | |
에버턴 FC | 풀 멤버스 컵 | 1990–91 | |
블랙번 로버스 | 풋볼 리그 3부 | 1979–80[9] | |
노츠 카운티 FC | 안글로-이탈리안 컵 | 1994–95[41] | |
개인 | |||
올해의 잉글랜드 감독 | 1984–85,[13] 1986–87[14] |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감독 | 1998년 1월[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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